어떤 인생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통과하며 죽음보다 낫지 않은 한 시절을 살아내기도 한다.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이런 상처와 아픔이 너무도 흔하다. 개인의 삶이 집단에 의해 철저히 짓뭉개졌는데, 개인자격의 대처조차 못하도록 이중으로 옥죔을 당한 이들이 많다. 시간마저 고령 생존자들 편이 아닌 듯해 초조함도 깊어진다. 뉴스타파의 세 번째 영화 <김복동>은 이 묵직한 고민을 담담히 풀어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 1992년 1월 이후 김복동이라는 한 사람이 살아낸 27년의 투쟁 기록이다. 평화운동가 김복동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영웅이었다. 영화는 명징하다. 문제는 보고난 이후다. 할머니들의 역사를 잘 몰랐으며 마주할 용기도 부족한 나 자신을 흔들어대는 울림이 있다. 자료를 뒤적여도 쉬 해소되지 않는 혼란도 동반된다. 여자의 인생에서 의미와 가치란, 누구의 딸로 태어났느냐에 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역경 속에서도 어떻게 개척해나갔느냐에 있을 것이다. 끝내 아버지의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 선례를 따라간 ‘아버지의 딸’일 뿐이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장본인 박근혜. 여기서 역설적으
이렇게까지 좋은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게 된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았다는 반가움이 무엇보다 앞선다. 지금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지 막연했던 것을, 극장에서 영화를 마주하고 나니 비로소 또렷해진 느낌이랄까. 연기한 배우들조차 전체 그림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궁금하던 차에 시사회 직후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인터뷰가 빈 말이 아닌 듯하다. 올해 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사 100년의 ‘성취’로 우뚝 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야기다. 디테일에 철저하다는 봉 감독의 장기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다만 “스스로 장르가 되고, 진화했다”는 공개적인 찬탄을 들었을 만큼 디테일에도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단지 모든 장면에 완벽을 기한다는 게 아닌, 일정한 간격과 호흡으로 가상의 한 세계를 온전히 구현해냈다는 쪽에 가깝다. 약간의 허술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꼼꼼함을 뛰어넘었다. 상상으로 그릴 수 있는 감당 가능한 선에서의 가장 커다란 ‘집’을 지었다. 대한민국의 한 부분을 떠냈는데, 세계 곳곳에서 온 영화인들이 모두 자기 나라 이야기라고 공감하며 세계 192개국에서 필름을 사갔다. 이 ‘집’이
제목이 눈길을 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 한. ‘아직’이라는 뜻이 어딘가 공감각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풋내와 땀내, 발그레한 볼과 치켜뜬 눈 등이 연상된다. 이미 반열에 오른 배우의 감독 데뷔작으로서 더없이 좋은 선택이 됐다. 징그럽다가 싱그럽고 절망 비슷한데 희망차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도 입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인 두 집의 딸들이 원수처럼 싸우게 된 이유는 윤아 엄마와 주리 아빠의 불륜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피붙이처럼 끈끈해진다. 둘 모두에게 유일한 남동생인 미숙아가 태어난 까닭이다. 아이들은 이 가녀린 생명을 자신의 일부로 첫 만남부터 받아들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과 같이 가겠다는 결심은 자신의 장래와 직결돼 있다. 난데없는 개입이지만, 모든 설정을 변경해가면서까지 남동생과 사는 미래를 꿈꾼다. 아니 그 미래를 어느 순간부터 살아버린다. “니네 아빠나 우리 엄마보다는 내가 더 자격 있지. 그러니까 내가 키워야지.” 반박 못 할 상황정리이기도 하다. 추하다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부모들, 그리고 당차고 야무진 딸들의 대비는 극이 전개될수록 간극이 커진다. 아찔할 정도다. 영화 속의 가부장은
이것은 거대한 우화다. 영화 <더 와이프(The Wife)>는 인류사 그러니까 남녀의 공생과 투쟁사를 압축한 메타포임을 첫 장면부터 숨기지 않는다. 기실 극 속에 애초부터 ‘비밀’ 따위는 없다. 비밀이 유효하다 여기며 그 커튼 자락을 잡고 무대에 오른 둘을 관객도 잠시 지켜볼 뿐이다. ‘쓰는 자’와 ‘쓰게 하는 자’의 만남. 이 둘은 필연의 관계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부부로 해로한 건 공조하기에 최적의 형태여서일 것이다. 이 둘에게 관계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과정이었으리라. 어쩌면 그 모든 문장들이 이 만남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주인공 조안과 조셉은 두 가지를 ‘쓰고’ 있다. 글과 가면. 글은 어떻게든 꼬박꼬박 나왔다. 가면은 벗지 않은 채로 영화는 일단 끝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그들은 당혹스러울 정도의 맨얼굴이었다. ‘말’로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을 뿐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대중도, 자녀들도, 평론가들도 보고 싶은 것만 봤을 뿐이다. ‘작가’는 늘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맡고 낯선 이성에게 수작 거는 취미생활을 이어가고, ‘조수’는 매일 8시간씩 서재에 틀어박혀 원고와 씨름했다. 이게 부부생
영화 <뺑반>의 세계는 불안정하다. “피와 기름이 범벅된 냄새”가 구토부터 유발하는 뺑소니 전담반원들의 현장은 끔찍하다. 교통사고는 일상적인 것 같지만 실상 개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혼돈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 안정적인 인물은 전직 경찰이자 현직 정비공인 서정채(이성민 분)뿐이다. 모든 인물이 혼돈 속에 내던져진 이 ‘카체이싱’을 즐기기로 했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호불호는 갈렸을 듯하다.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혼란스러움이었다. 등장하는 남녀의 성향은 물론 권력관계나 권력 쟁취 방식은 기존의 영화들과 다르다. 섬세하게 ‘축’이 옮겨져 있다. 남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붕괴’되어 있다.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남김없이 깨져나간다. 여기서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오랜 ‘동일성’에 집착하며, 무슨 수를 써서든 ‘나’로 남겠다는 광란의 장본인이 정재철(조정석 분)이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악에 경도된다. 재철은 ‘바뀌지 않겠다’는 아집을 타인들을 희생시켜가며 강요하고 관철하는 ‘절대자’로 군림한다. 상대방의 머리통을 전기 드릴로 뚫을지언정, 자기 생각을 수정할 마음이 없다. F1 레이서 출신의 자수성가한 재벌이지만 미성숙한 재철은